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일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 [[파일:EndOfWorldWarI.jpg|width=100%]] || || 콩피에뉴 휴전 협정 || 11월 11일에 휴전이 성사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물론 휴전이 성사됐다고 바로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휴전 체결 다음날부터 발효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그날 자정까지 전투가 계속되고 독일이 휴전 이후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지분을 확보할 심산으로 악착같이 저항하여 양측 모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동유럽 쪽에서는 계속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최대 후원자인 러시아가 빠진 이상 애초에 이 지역의 주도권은 독일이 쥐고 있었으므로 의미가 없었고, 일단 가장 큰 전장은 종결되었음이 분명하다. 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된 이유는 약간 복잡했는데, 우선, 휴전을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엄연히 있었으며,[* 샤를 망쟁, [[존 조지프 퍼싱]], [[필리프 페탱]]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상당한 손실로 인해 저항력이 극도로 떨어져 다음해쯤 되면 무너질 게 분명했던 독일군과는 달리 협상군은 손실을 꽤 입어도 지속적으로 오는 미군으로 어느 정도 보강하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협상국의 막대한 군수 생산[* 대표적으로 프랑스는 [[FT-17]] 경전차를 10,000대 이상을 주문한 상황이었으며, 당장 보유한 전차만 해도 3,000대가 넘고 미국 본토에서도 르노 경전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과 미국의 든든한 지원이 있기에 독일 제국이 굳이 발악한다면 전쟁이 더 길어져도 독일 제국 본토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협상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독일 측에서 협상국의 항복 조건을 모두 수용한다면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가 워낙 피폐해져 독일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상황인데다[* 프랑스의 농업 생산력이 뛰어난데다 미국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난을 겨우 면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만일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프랑스가 진작에 먼저 [[순무의 겨울]]을 맞았을 것이 틀림없고, 영국 역시 프랑스 전선에 병력이 계속 빨려들어가면서 내부적으로 전쟁에 대한 반발여론이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도 서부전선에서 언젠가는 이길 거라는 믿음으로 전쟁을 수년간 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걸 뒤집은 게 미국의 참전이었다.] 미국의 지분율 확대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분율 확대는 포슈뿐만 아니라 [[조르주 클레망소]]와 [[필리프 페탱]]도 경계하는 부분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프랑스 입장에선 피를 상당히 흘리고 승리했는데 미국이 지분율 많이 확대하는 바람에 이겨놓고도 목소리를 크게 못내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백일 공세 후반에 프랑스의 지분율과 비중은 떨어지고 있었으며, 영국은 지분율을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인 반면 미국은 지분율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었다. 따라서 포슈는 독일의 휴전을 받아주는 대신 외교를 통해 철저히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애초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공공의 적인 독일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적인 동맹이었지, 혈맹같은게 아니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제국주의 열강답게 서로가 식민지를 놓고 다투던 경쟁 국가였다. 더군더나 불과 100년전엔 영국 육군과 해병대를 영국 해군이 실어날라 미국 백악관과 수도를 불태운 바 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전간기에 작성한 [[색부호 전쟁 계획]]에서 대서양과 아메리카 대륙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질 지도 모를 영국과의 전쟁은 가장 심도 있고 세심하게 기획되어 있었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가 이후 미국을 견제하지 않게 된건 사실이다. 전후 복구와 대공황으로 인해 내부 수습에 급급해졌고, 복구 좀 하자마자 터진 2차대전과 식민지 해체로 나라가 결딴나버렸기 때문. 그 다음엔 어딘가 어설펐던 러시아 제국과는 비교를 거부하는 공산국가 소련의 위협에 직접적으로 시달리면서 안했다기보다는 못했다고 보는 게 맞다.] 그래서 1차 세계 대전을 살펴보면 영국과 프랑스가 여러차례 지분율을 두고 얼굴을 붉힌 사례가 있었으며, 미국원정군 총사령관 [[존 조지프 퍼싱]]은 영프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미군을 구성하려고 노력을 한 것만 봐도[* 결국 [[2차대전]] 때는 독립적인 미군이 문제가 아니라 미군이 오히려 총사령부를 맡게 된다.] 협상국 내에서 지분율 문제가 웃어넘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교적 차이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어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